개가 반드시 인간의 친구여야 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개가 먹는 음식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 각자는 '그렇게 생각해 왔던 습관'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개고기 식용 논쟁은 곧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개가 인간의 친구라는 생각은 주로 서양 문화에, 음식이라는 생각은 동양 문화에 퍼져 있었습니다. 개는 1만 년 전 늑대와 유전적으로 분리되어 가축화가 이루어진 후 처음에는 인간들의 사냥을 도우며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삶이 다양해지면서 개라는 존재의 의미도 달라져 갔는데,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에서는 개가 본격적으로 '인간의 친구'의 반열에 오릅니다. 대규모 공장이 생기며 도시로 인구가 몰리고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이웃이나 가족에게서 충족했던 관계나 정서적 욕구를 반려동물이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한편, 농경문화 중심이었던 동양에서는 한 곳에 씨를 뿌리고 공동체의 조화와 협동의 힘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경계할 이웃이 없었습니다. 그 옛날 수렵시절부터 가축화한 개들도 그냥 함께 있어왔죠. 그러다보니 개라는 존재가 약간 '잉여', '흔해 빠진', '쓸데없는'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날이 더워지면 기력을 보충하는 음식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농경문화권에서 농사짓는 소를 함부로 잡아먹을 수는 없었고, 돼지나 닭고 큰일 있을 때나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잉여롭게 돌아다니던 개가 그들의 흔한 단백질원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동의보감>, <본초강목>등에도 개고기의 효능과 식용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동, 서양 역사와 문화적인 흐름에서 살펴보면 딱히 논쟁거리도 아닌 문제 같은데요. 개고기 식용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 중 일부는 '개와 나의 관계'에 대한 의미 부여가 강합니다. 어떻게 친구를 먹을 수 있냐는 강경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개를 친구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잔혹한 학대를 일으키기도 하고, 원하는 품종을 얻기 위해 유전적 변화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개고기 식용 논쟁은 단순히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 개고기 논쟁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p267에서 더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견해는 어느새 우리 사회에 '혐오'를 등장시켰습니다. 급식충, 설명충, 맘충 등 이런 혐오는 선호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상대와의 갈등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저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라는 질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겠지."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안다면 혐오, 혹은 극혐 같은 표현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요.

북모닝이 5월에 추천하는 책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는 이처럼 문화심리학을 통해 나와 다른 존재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는 시각을 제공합니다. 다른 문화와 역사를 알고 이해하는 데 익숙해지면 내 옆, 여기 함께 있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