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모범이 바로 경주 최 부잣집입니다. ‘최 부자’가 아니라 ‘최 부잣집’이라고 하는 건 단순히 한 인물에 그치지 않고 무려 400여 년을 이어오면서 가문 전체가 그런 모범을 보인 보기 드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최 부잣집에서는 애당초부터 전혀 마름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름은 멀리 떨어진 대지주를 대신해서 농토를 관리하는 대리인입니다. 여러 면을 하나로 묶어 마름 한 사람을 설정하는 게 보통이었다니 힘깨나 쓸 수 있는 역할이었습니다. 부재 지주를 대리하여 모든 재산권 관리를 했는데, 소작료를 징수하고 지세 공과금 처리와 토지 개량까지 도맡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심지어 다음 농사에 소작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다 보니 소작인들에게는 저승사자와 다를 바 없는, 무소불위의 횡포를 저지른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경주 최씨 집안은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름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작인을 후하게 대접하고 가족처럼 여겼을 뿐 아니라 심지어 여러 가지 부역을 피할 수 있게 했다니 소작인들의 최씨 집안에 대한 존경과 충성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거대한 조직은 최 부잣집처럼 중간관리자 없이 꾸려갈 수 없습니다. 최 부잣집에서는 소작인들과 직접 소통을 하며 서로 간의 신뢰와 애정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에서 직접 소통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현대 조직 사회는 최 부잣집 식으로 꾸려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 부잣집에서 마름을 두지 않았던 걸 역으로 생각하면, 어떤 마름을 어떻게 두느냐가 최 부잣집의 경영관을 현대 기업이나 조직에 유용하게 끌어 쓸 수 있는 관건이기도 합니다.
  
 소통의 가장 중요한 코어가 바로 마름의 역할입니다. 위와 아래의 통로를 차단하는 마름은 조직을 병들게 하겠죠. 반면 밸브 조절을 잘하는 마름은 조직을 활성화할 겁니다. 그걸 키우는 게 최고경영자의 몫이고 그게 그의 능력입니다.
기업의 경우 ‘밸브 컨트롤러’로서 중간관리자를 임원이 되기 전 현장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정리하는 시기로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발로 뛰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 감각을 유지하고 다음 단계에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계기라고 여겨야 합니다. 부하 직원들에게는 명령자가 아닌 팀의 리더이며 동료로서 신뢰와 모범이 될 뿐 아니라, 하부 조직을 다루는 관리자로서의 수련기로 삼아야 하고요. 팀장으로서의 중간관리자는 조정자(코디네이터)의 역할뿐 아니라 기획자(큐레이터)의 역할도 수행해야 합니다.
 예전 축구에는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미드필더라는 말도 없었죠. 라이트-레프트 이너가 링커라는 개념으로 바뀌었고, 다시 미드필더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와 독일의 축구황제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습니다. 모든 공격과 수비는 미드필더에 의해 시작되어 연결되고, 이들은 전체 게임의 리더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공수의 전환뿐 아니라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의 핵이고 전술의 사령관입니다.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바로 미드필더와 같습니다. 강력한 미드필더는 팀의 승패를 좌우하는 키 플레이어이고, 소통과 통솔 능력이 없는 미드필더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중간관리자 또는 현대적 마름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에서는 ‘마름’과 ‘미드필더’에 빗대어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중간관리자는 최고경영자의 지시사항을 받아 움직이면서, 동시에 리더십을 발휘해 부하 직원들을 이끌어가야 하는 위치입니다. 이들은 종종 ‘꼰대’라는 비난을 들으며 원망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직에 필수적인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좋은 중간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반대로 나쁜 중간관리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