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의 탄생>은 야코프 푸거라는 15세기 유럽을 살았던 한 자본가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푸거는 메디치, 로스차일드, 록펠러, 빌 게이츠에 비하면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지만 사실 이들 못지않게 부유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푸거는 자신이 살았던 14~15세기 유럽 전체 GDP의 2퍼센트를 단독으로 소유했고 자본주의의 탄생, 종교개혁, 합스부르크 제국의 건설, 독일 농민 전쟁 등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관련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관한 책을 쓴 사람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증권 분석가입니다. 대체 왜 증권 분석가가 야코프 푸거에 대한 책을 썼을까요? 왜 우리에게 15세기에 살았던 부자의 삶을 들어보라고 권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푸거가 권력, 안락한 삶 등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던 순수한 의미의 ‘자본가’였다고 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자본가가 어떤 사람인지, 돈을 인생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감 없이 맛볼 수 있다고 합니다.

 
 푸거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푸거의 부모는 독일에서 작지 않은 규모로 직물매매업을 하고 있었기에 금수저까진 아니어도 은수저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적당히 벌어서 잘 먹고 잘살 생각이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을 물려받고서 푸거는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구리 산업입니다. 전쟁이 빈번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주요 무기는 대포였기에 구리가 무척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헝가리가 지배하던 카르파티아산맥은 유럽의 주요 구리 산지였음에도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위험이 너무 컸습니다. 구리 채굴 시설, 운송로, 가공 공장 등을 갖추는데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고, 그렇게 투자한 돈이 수익으로 돌아오려면 몇 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헝가리는 독일 땅이 아니고 튀르크의 침공을 자주 받는 불안정한 지역이었습니다. 구리 산업은 비용이 많이 들고 변수가 많은 골치 아픈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푸거는 자신이 후원하던 막시밀리안의 군사적 재능을 보고 구리 사업이 가능하겠다고 판단하여 막대한 투자를 시작합니다. 이탈리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 등을 연결하는 아르놀트슈타인을 매입해 당시 유럽 최대의 구리 가공 공장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방벽을 쌓습니다. 헝가리 광산을 소유할 수 없으면 파산할 수 있는 결정이었지만 그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막시밀리안이 오스트리아 빈 지역을 차지하고 헝가리까지 진격해가자 헝가리는 독일 상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조약을 맺습니다. 푸거는 광산 개발에 일가견이 있는 헝가리 출신의 투르조와 손을 잡고 헝가리 구리 광산의 소유권을 따내어 대규모 구리 산업을 완성합니다. 기회를 포착하는 선구안과 사람을 설득하는 수완으로 푸거는 세계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올라섭니다.

 그러나 푸거에게 이렇게 멋진 사업가의 모습만 있는 건 아닙니다. 쌓아 올린 부를 지키고 굴리기 위해서 푸거는 여러 곳에 ‘투자’를 합니다. 교황과 주교에게 뇌물을 공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지역 공무원들의 월급도 푸거가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여러 이권과 편의를 받았습니다. 유명한 역사적 사건들에 개입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고리대금을 금지했던 가톨릭교회가 대금업을 사실상 합법화하게 되는 것도 푸거가 지원했던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힘이었고, 교황청이 면죄부를 판매하게 된 것도 푸거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많이들 아시는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푸거가 운영하던 광산들도 근무 조건이 혹독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임금은 높았지만,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줄 만한 투자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단체 행동에 나서자 주모자를 처형하고 추방하기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푸거의 구리 공장에서는 유독한 폐기물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불만이 나오면 돈을 쥐여주고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그래서 독일 농민 전쟁이 발발하자 푸거가 농민과는 관련이 없음에도 공공의 적이 됩니다.
이렇게 양면적인 푸거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자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돈만 생각했기에 푸거가 해낸 일들이 있습니다.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사업을 성립시켰고, 발전을 구속하던 제도들을 혁파했습니다. 순수한 의미의 자본가는 진보의 동력인 셈입니다. 그러나 돈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에게는 윤리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익이 된다면 정경유착도 서슴지 않고, 피도 눈물도 없는 결정도 곧잘 합니다. 자본가는 악마도 될 수 있음을 푸거가 잘 보여줍니다.
 자본주의가 정착한 오늘날 우리는 곳곳에서 작은 야코프 푸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재벌들도 어찌 보면 야코프 푸거의 삶과 유사한 측면이 많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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