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은 신간 에세이집 『연필로 쓰기』에서, 이순신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록 조선 전쟁사나 이순신의 생애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지만 이순신의 생애는 자신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고 고백합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칼의 노래』의 집필 준비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문헌과 기록, 이순신이 남긴 글들을 독파하며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과 장군으로서 그의 리더십에 대해 정밀하게 들여다보게 된 게 그 계기였다고 합니다.

다음은 김훈의 『연필로 쓰기』 출판사 편집부의 글입니다. 

아래 글을 통해 이순신의 리더십, 자신의 업業에 대한 철학, 인간됨됨이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해봅시다.




 


리더십이란 남을 지휘통솔하고 장악하거나 자발적 헌신을 유도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지도적 자질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전쟁에서 리더십이란 고난을 돌파하고, 고난을 향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몰아가는 힘일 것이다.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특징은 대체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이 전쟁은 한민족이 통일왕조 수립 이후로 치러야 했던 수많은 민족방어전의 하나라는 점이다. 이 전쟁은 온 민족의 힘을 합쳐서 국토를 유린하는 압도적인 왜세와 맞서야 했던 총력전이며 전면전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이나 또는 일본 중세의 군사적 패권을 건설하기 위한 내전 성격의 국지전과는 판이한 것이다.

둘째, 이 전쟁은 민족방어전이라는 절체절명의 사명을 걸머진 사활적 싸움이었지만, 그 사명의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로부터 아무런 물적 인적 지원이 없었던 전쟁이라는 점이다. 중앙정부는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라는 지휘권을 인정해준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지휘권은 끊임없는 정치적 감시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가 투옥되고 백의종군하는 비극의 근원이 되었다.

전시에 지방 관아는 수군에게 일정한 군량을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피난민들의 경작지 이탈과 지방 관아의 부패 등으로 군량 징수는 용이치 않았으며, 실제로 이순신의 수군 부대는 계사년 한 해 동안 한산 수영에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는다. 이해에 이순신 휘하 수군 6200여 명 중 10%에 달하는 600명이 굶어죽었고 나머지 병졸들도 극심한 배고픔과 질병으로 전투에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난중일기』 계사년 편) .

따라서 이순신의 전쟁 경영이란 적을 섬멸하는 전투 지휘뿐 아니라 군수, 병참, 보급, 징모徵募 , 부상자 처리에서부터 전함 제작, 화포 제작, 탄약 생산, 농경, 제렴製鹽 에 이르는 전쟁의 모든 국면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의주로 달아난 피난 조정은 오히려 남해안의 수군 진영에 대해 궁중용 소비물품(종이, 훈련용 총포와 탄약) 을 요구해오는 판이었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에 의지해서 그의 지도력이 작동하는 모습을 헤아리건대, 그는 우선 이 모든 악조건과 그의 정치적 불운을 모두 ‘사실’로 긍정하고 있다. ‘사실’에 정서를 이입시키지 않고 ‘사실’을 오직 ‘사실’로서 수용하는 태도는 그의 리더십에 한 중요한 본질을 이루는 듯하다.

그가 바다에서 벌어졌던 전투나 그의 신변에서 공적으로 발생한 일을 상부에 보고할 때 얼마나 사실성을 존중했는지를 드러내 보이면 다음과 같다. 개전 초기인 임진년 4월 15일에 조정으로 보낸 장계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하 이(이순신).
삼가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일을 보고합니다.
오늘 4월 15일 술시에 받은, 4월 14일 발송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그런데 “왜선 150여 척이 모두 향했다”고 합니다. 이는 보통때 있는 세견歲遣 (세견선) 종류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이순신)도 군사와 병선을 정비해 강어귀에서 비상사태에 대비하고江口待變 , 겸 관찰사, 병마절도사, 우도 수군절도사(이억기)에게 모두 말을 달려 공문을 보냈습니다. 또한 바닷가 각 고을과 포에도 한꺼번에 말을 달려 공문을 보내 점검하고 바로잡아 비상사태에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임진년 4월 15일 술시 절도사 이순신 올림

 
 
이라고 기록했다. 이 보고서는 원균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다시 상부에 보고하면서, 전해들은 정보와 자신이 내린 조치를 정확히 분리하고 있다. 원균의 첩보에 따르면 웬 수상한 선단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것이고, 이순신은 이 첩보를 다시 간접정보로서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1차 첩보가 발송된 시간과 이 첩보가 자신에게 도착한 시간 및 이 첩보를 다시 상부에 보고하는 시점을 날짜와 시간까지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