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 계단에 불편한 몸으로 추위에 떨며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고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 그런데 다가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바쁜 걸음으로 지나쳐가니, 나 혼자 멈추어 서기가 쉽지 않다. 내가 멈추면 지나가는 길에 방해가 될까? 나만 착한 척하는 거 아니야? 얼마 되지 않는 돈이 도움이 될까? 괜히 천 원짜리 한두 장 넣으면 자존심 상하는 거 아닐까?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우물쭈물하는 순간 나는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 자리를 지나쳐버리고 만다. 그 작은 도움을 주는 것에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다니, 이래서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나 있을까?

눈치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말은 참 자주 쓰는 말이지만 막상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려면 참 어렵다. 한참을 고민 끝에 나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나의 마음보다 남의 마음을 더 많이 살피는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더 많이 살핀다는 이 정의가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아마도 그동안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와서 이제는 남의 마음도 좀 살피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정의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그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많이 살펴온 것에 지쳐 이제는 나를 더 돌아보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추측이지만 아마도 후자가 더 많지 않을까(적어도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말이다).

나는 이 정의를 써놓고도 한참을 살펴봤다. 나의 마음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남의 마음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인데, 남의 마음을 ‘더 많이’ 살피는 것은 좋은 것일까, 좋지 않은 것일까. 타인을 더 살피는 것이 따뜻한 배려로 느껴지기도 하고, 나를 덜 돌본다는 건 안타깝게도 느껴지기도 한다.(눈치 보는 게 좋은 거야, 안 좋은 거야?)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없다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눈치도 그렇다. 눈치는 관계에서 수시로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면 나를 잃어버리기 쉽다. 눈치라는 단어는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로 쓰인다. 눈치의 여러 기능 중에 긍정적인 부분을 내게서 키우면 된다.

눈치가 없다는 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못 읽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눈치가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센스가 있다’는 것이다. 눈치를 본다는 건,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눈치를 안 본다는 건 ‘내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으면서, 내 마음도 잘 표현할 수 있으면 ‘눈치는 있지만, 눈치 보지는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눈치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눈치 있기를 바라고, 나 자신은 눈치 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눈치라는 건 좀 더 다른 사람을 위해 생긴 기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한다면 ‘눈치’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그래서 나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살고 싶다!”라고 외치는 것 아닐까.

눈치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사회생활에서 센스 있는 민첩함으로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잃지 않는 건 더 중요하다. 내 마음을 표현하며 나답게 사는 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을 살피는 마음’보다 ‘나를 살피는 마음’에 조금 더 비중을 두려 한다. 그동안 한쪽 날개만 써왔다면, 이제 다른 쪽 날개를 집중훈련하려 한다. 두 날개에 균형이 잡히면, 진짜 내 모습으로 힘차게 날아가리라.


 

 
말하기의 디테일
강미정 |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