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유인입니까 노예입니까

 단순하고 가혹한 이분법이지만 로마인에게 “당신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Servus es an liber?”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신원조회 사항이었습니다. 일상에서 “당신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라는 질문은 다양한 형태의 의문문으로 던져졌습니다.

“우트룸 세르부스 에스 안 리베르?Utrum servus es an liber?”
“세르부스네 에스 안 리베르?Servusne es an liber?”

또는 “당신은 자유인이었습니까?Fustin(Fustine) liber?”라고 과거형으로 묻기도 했지요.
물론 이 자유인과 노예의 이분법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페니키아 출신의 법학자 울피아누스는 “시민법에서 노예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자연법에선 그렇지 않다. 자연법에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연법이란 모든 시대와 장소에 적용되는 변치 않는 규범으로 현재 시행되고 있거나 과거에 현실적으로 시행됐던 실정법의 우위 개념입니다. 하지만 로마법은 엄연히 자연법이 아니라 실정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원칙과 이상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피부에 더 와닿는 것은 현실의 규약들이지요. 로마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적용된 법률은 ‘평등의 자연법’이 아닌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까지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실정법이었습니다. 결국 대전제로는 인간이 평등한 존재라고는 하나, 현실적으로 평등과 다름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자유인’에 국한돼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노예는 열등한 존재였습니다. 인격이기 전에 소유할 수 있는 재산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법률상 매매와 증여, 상속과 유증遺贈의 대상이었습니다. 노예를 소유한 주인은 자기가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고 느꼈고, 노예는 자기 자신의 열등함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나아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로마 사회는 노예는 우연히, 운이 나빠서, 후천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그렇게 태어난다고 설명하는데, 이 우열의 논리는 거의 모든 역사를 관통하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자유인과 노예의 실상을 알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끼리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어서 화가 치미나요?
 
그러나 저는 어떤 면에서는 로마 시대와 오늘날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노골적인 신분제만 없다 뿐이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조건과 양상은 어떤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물론 오늘날에는 ‘자유인인가? 노예인가?’라고 대놓고 묻거나 신원을 조회하는 일은 거의 없지요. 하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는 소속과 경제력에 대한 교묘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을 가르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당신은 전임교수인가? 시간강사인가?”
“당신은 서울캠퍼스 학생인가? 지방캠퍼스 학생인가?”

앞서 인용한 베르베르의 글처럼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농도도 저마다 다르겠지요. 그러나 어두운 빛깔의 안경을 쓰고 거칠게 말하자면, 현대인은 각자의 일터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든 비정규직으로 일하든, 연봉과 소득이 얼마이든 간에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임금노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안정’과 ‘불안정’으로 삶의 질을 나누는 세태가 결국 한 인간의 가치가 돈에 매여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오늘날의 사회는 얼핏 평등하고 자유롭고 자기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저 그렇게 보일 뿐 현실은 뼈저리게 불평등하고, 약자는 끊임없이 강자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약자들이 미약하게나마 움켜쥐고 있던 것마저 빼앗겨 저항과 울분의 목소리를 토해내면, 그 소리는 이내 더 큰 권력에 묻혀버리지요. 여성, 소수자, 장애인, 빈자 들이 지금도 머리에 피가 맺히도록 두드리고 있는 저마다의 ‘유리천장’은 또 얼마나 강고합니까? 차라리 로마시대처럼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신분제가 있었던 사회가, 지금처럼 내 머리 위에 드리운 것이 푸른 하늘인 줄 알았더니 개인의 노력으로는 절대 깨부술 수 없는 무서운 유리천장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사회보다는 그 절망과 피로도는 덜하지 않았을까요?
 
언젠가부터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고들 합니다. ‘인생 역전’ ‘자수성가’의 시대는 진작 막을 내린 것입니다. 인간이 불굴의 의지로 현실적인 장벽을 극복하는 사례는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만인에게 모든 기회와 도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듯하지만, 실은 교묘하게 차단되어 있는 갑갑한 현실은, 노예가 운명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고대의 야만성과 참으로 닮아 있습니다. 인간, 참으로 고귀하고도 허망한 이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그 아름답고 위대한 가능성을 포기하고 ‘신분’이라는 좁디좁은 틀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이해하고 평가하니, 인류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되었다 한들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문명은 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법에서 인간은 ‘페르소나persona’ 이외에도 ‘호모homo’라는 단어로 지칭하곤 했습니다. “‘호모homo’, ‘인간’이라는 말에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Hominis’ appellatione tam feminam quam masculum contineri non dubitatur.”(D. 50, 16, 152).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을 나타내는 ‘호모’라는 단어가 로마에서 노예의 의미로도 자주 사용됐다는 점입니다. ‘호모’의 복수 ‘호미네스homines’는 집단적으로 황실 관료나 고급 관료에게 종속되어 따라다니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호모’가 ‘페르소나’를 잃고 집단에 종속되어, 그저 무수한 복수 가운데 하나로서 대세와 신분제의 늪에 안주해버리면, 저절로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거듭 묻습니다.
‘페르소나’를 가진 인간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호미네스’ 중 하나로 살아갈 것인가.
나는 진정 자유인인가, 아니면 스스로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인가?
이 수많은 제약들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 인간…… 참으로 신비하고 모순된 개념이여!

로마법 수업 | 한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