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내면을 흐르는 삶의 동력과 맺는 관계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어머니와의 초기 경험에 달려 있다. 어머니가 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개인적 콤플렉스를 아들에게 강요한다면, 그만큼 아들은 버림받고 짓눌리는 상처를 맛봐야 한다. 버림받은 상처에서 아들은 자신의 가치와 세계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짓눌리는 상처로부터는 자신의 연약한 경계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을 느끼며, 이는 보통 순응하거나 의존하는 성격, 또는 공포에 질린 채 과잉보상을 추구하며 힘에 지배되는 성격으로 발전한다.

어느 쪽이든 진정한 자신과는 거리가 멀며, 그런 삶은 자기 본성마저 점령해버린 강력한 경험에 대한 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타협은 아동기 내내 되풀이되면서 거짓된 성격을 형성하는 한편, 이후 성인이 되어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까지 최초의 관계에서 형성된 투사를 지속하게 만든다. ‘ 거짓된 자기false self ’ 인 채로 살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완전히 의존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걸 위협하는 모든 것에 크나큰 공포를 느낀다. 모든 남성은 자기 내면에 이러한 무력함의 기억을 복제된 형태로 지니고 있다. 남성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수 있으며 그 결핍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존성이 지속될 거라는 막대한 공포에 시달린다. 젊을 때나 나이 들었을 때나 여전한 이 괴로운 상황은 남성이 분노와 슬픔을 계속 키워온 결과다. 남성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분노하며, 무언가를 상실하면 슬퍼한다. 나이가 들어 성인기에 주어지는 역할을 수행하느라 지치고 시달리는 동안이들 감정은 무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에너지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으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우울함, 질병, 폭행, 경쟁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의 아니마는 외면당한다. 아니마는 어머니의 세계를 상기시킬 것이라고 의심받기 때문이다. 물론 ‘ 어머니’ 라는 존재는 온갖 짜증이나 성질부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남성의 슬픔은 우울함으로, ‘ 어머니’ 속으로 두루뭉술하게 들어가려는 중독의 형태로, 또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자신을 치유해줄 누군가를 향한 애매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역동성 아래 한편에는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남성의 두려움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짓누르는 의존성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남성은 자기 내면과 외부 양쪽에서 여성성에 맞서 싸운다.

모든 남성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어머니의 이마고가 자리잡아 저마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주고 있다. 그래서 남성들의 의식이 제한된다면 대단히 과보호되고 왜곡된 남성상이 형성된다. 어머니 콤플렉스에 대한 방어책으로 남성은 여러 가지 법과 규칙을 통해, 위계적 사고와 사회구조를 통해, 그리고 여성성을 진압함으로써 가부장제를 발전시켰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대화조차 나누면 안 된다.

크로노스와 새턴처럼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거세되었으며 자기 아들 역시 거세시키려 한다는 부끄러운 비밀을 공유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책 역시 문제만큼이나 똑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즉 콤플렉스의 끔찍한 억압과 그 반응으로 나온 가부장제, 이 두 가지 다 남성을 자기 내면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남성은 어디서든 어린 시절 경험을 마치 현재의 경험인 양 지니고 다니며 배우자, 사회제도, 그리고 ‘ 유사품’ 감정과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다. 과거는 사실 진짜 과거가 아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언제나 내면에 살아 있다. 이는 실제 부모님만이 아니라 부모라는 집단적 경험까지 포함하는 의미다.

따라서 예전의 해묵은 욕구와 공포, 갈망, 분노 모두를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느끼기 때문에 남성은 이들의 역학구도를 현재 자신 주변에 있는 타자에 투사한다. 이렇게 되면 부모가 과거에 지녔던 힘을 투사 대상인 타인이 갖게 된다. 남성은 이 힘을 통제하거나 달래려 할 수도, 아니면 완전히 회피하려 할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많은 남성이 분노에 가득 차 가정이나 직장에서 지배하고 통제하려 하는지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이른바 ‘ 수동공격성’ 을 지닌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 역시 이걸로 설명된다. 평소 무력감을 느끼지만 여전히 분노를 지닌 상태에서 타자를 통해 파괴와 전복의 욕구를 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욕구와 두려움에 스스로 대처해서 남에게 쏘아대던 투사를 걷어내는 법을 보여줄 긍정적인 남성성의 표본이 거의 없다시피 하므로 이들의 무력감은 더욱 극심해진다.

어머니 콤플렉스가 내면에서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키는지 파헤치지 못한다면 남성은 절대 현실에 발 디딜 수 없다. 타자를 순수하게 자기와 다른 누군가로 대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정말로 그렇다. 내면의 작용들을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엄청난 용기와 통찰력, 인내가 필요하며, 이는 꾸준히 계속해나가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남성에게 어머니 콤플렉스는 특히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것이 삶에 얼마나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밝혀내면, 그나마 자신이 힘겹게 붙들고 있던 남성성이라는 정체성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제를 기꺼이 떠맡지 않는다면 남성은 마치 손해배상처럼 얻은 가짜 정체성에 얽매이며, 내면의 분열과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만 심해질 것이다.